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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 이야기

본 글은 '먼지 이야기'의 '월하'시점 버전입니다_ 먼지 이야기와 시간적으로 대응합니다 (숫자 참고)

0_

"하늘님."

 "내 소원 딱 하나 있는데요."

"나 친구 하나만 주세요."

1_

네가 태어난 것을 내가 아직 몰랐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세상에 나서부터 섬뜩하리만치 새하얬다.

불길하다며 버려질 뻔 하였던 나는 

거의 부모를 만나지 못하고

하인들 손에 자라났다.


2_

그깟 흑색을 가지지 못해서

나는 아무것도 원하면 안 되었다.

3_

어느 날 너와 눈이 마주쳤다. 

그림자가 방긋 웃었다.

소름이 우수수 돋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4_

책에서 온갖 그림자 요괴를 몇몇 알아보았다.

그슨대.

 그 단어가 내 눈을 잡았다.

"..지능은 갖고 있는 모양이네."

호기심이 생겼다.

5_

촛불을 등지고 앉으면 너를 더 선명히 만날 수 있다.

누구냐 물었더니 모른댄다.

하긴, 나도 내가 괴물인지 사람인지 모르겠는 걸.

"바보."

바보는 나인가.

6_

너도 똑같이 바보인 주제에

너는 내가 원하는 흑색을 잔뜩 가졌다.

얄밉다.

"먼지."

"이제 네 이름은 그거야."

그건 내가 아는 최고의 욕이다.

7_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먼지를 부르곤 했다.

좋댄다. 바보.

9_

훈장님 손자하고 싸워서 혼났다.

근데 걔가 먼저 나한테 저주받은 괴물이라 했단말야.

그런 녀석 머리채는 뽑아도 되잖아.

10_

아파서 못 일어났는데 이상하게도

누가 안아준 느낌이 들었다.

날 안아줄 사람따위 없는데.

11_

"먼지야. 정말 내가 저주를 받은 걸까?"

내가 얘한테 별 얘기를 다하네 싶었는데

먼지가 열심히 아니라고 해줬다.

엄청 당황하는 게 보였다.

내가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건 먼지밖에 없다.

12_

역병이 돈단다.

올해도 내 탓이라 하겠지.

13_

먼지한테 이름을 가르쳐주었더니 예쁘다며 나를 달님이라 불렀다.

내 눈에는 네가 훨씬 예쁜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 혼자 깜짝 놀랐다.  

오늘 밤은 못 잘 것 같다.

14_자작곡을 불러주었다.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 듣기에 부끄러워져서

"잊어버려."

거짓 부탁을 했다.

15_

먼지도 그 소문을 들었을까.

문득 걱정이 되었다.

기껏 찾아낸 내 작은 행복인데.

15.5_

"올해야말로 그 녀석을..."

아마 오늘 밤이 내 마지막 밤이 될 것이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로.


16_

촛불을 등지고 앉았다.

너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게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해 멈추지 않았다.

이상하네. 

알고 있었는데.

태어나서부터 줄곧-.

나는 죽어야하는 괴물인데.

"너도 내가 죽어야한다고 생각해?"


17_

아아, 하늘님.

난 이 말을 듣기위해 줄곧

이 삶을 살아왔군요.

"도망쳐요."

네가 말했다.

18_

온통 너-, 

그림자로 가득한 시간.

우리는 밝아올 아침을 피해 도망쳤다.

이러면 안된다는 것도

안 될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젠장, 난 왜 쓸데없는 것만 다 알고있는거야..!

19_

다 끝났어.

20_

나를 붙잡은 사람들의 눈에서 

의심과 공포가 사라지고

확신과 경멸이 느껴졌다.

잘못된 선택지 외에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건 없었어.

마지막 저항으로 촛불을 휘둘렀다.

21_

그게 먼지를 아프게 하고 말았다.

"달님."

"달님, 아파요"

"불은 나한테 너무 아파"

"이거 싫어요, 잘못했어요."

"달님, 먼지 그만 아프게 해주세요."

먼지가 내게서 끊어져 나가 거대한 본체를 드러냈다.

그러고보니 그슨대는 원래 사람 죽이는 악귀더랬다.

폭주하는 요괴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무능한지 너는 알고 있을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먼지 살려달라고 우는 것 밖에는.

22_

먼지가 어린아이 모습으로 돌아온 때까지도

그렇게 목이 쉬도록 우는 것 밖에는.

23_

너는 나부터 챙겼는데

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을 네게 하고 말았다.

24_

먼지야. 어떡하지.

인간은 나약해.

공포 앞에 너무나도 약해.

자꾸 마음하고 말이 반대로 나가.

고맙다고 해야하는데.

너밖에 없다고 해야하는데.

너한테 상처를 주는 나 같은 건,

먼지야 차라리 네 손으로 날 죽여줘.

25_

"달님은 아무도 안 해쳤어요."

하늘님 어쩜 이렇게 과분히도

"역병도 흉년도 나도. 달님 때문은 아니에요."

사랑스러운 아이를 내게 주셨나요.

"먼지야."
"우리 둘만 있는 데로 가자."
"그럼 아무도 죽이지 않고, 그치?"

"난 괴물인데?"

"나도 괴물이야."


26_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젠장, 젠장, 도망가야 하는데 이 망할 다리가.

어떻게 너 때문이라고 해.

너는 행복이었는데.

나를 데리고 가줘.

입에선 말이 되지 못한 울음소리만 떨어졌다.

27_

나는 너 없는 삶에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괴물로?

28_

나는 영영 어른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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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이야기